본문 바로가기

전체 글142

익히기보다 익숙해지는 삶 - 모리시타 노리코의 일일시호일을 읽고 「일일시호일」을 읽기 전까지 나는 다도를 차를 우리는 기술쯤으로 생각했다. 계절에 맞는 꽃을 꽂고, 정갈한 다기를 준비하고, 정해진 예법에 따라 차를 우리는 일. 그 정도가 다도의 전부인 줄 알았다. 하지만 책장을 덮고 난 뒤 마음에 남은 것은 차가 아니었다. 오히려 삶을 살아가는 태도였다. 이 책은 다도를 배우는 이야기가 아니라, 삶을 배우는 이야기였다. 노리코는 사촌 미치코와 함께 다도교실을 찾는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낯설다. 왜 이런 순서로 해야 하는지, 왜 그렇게 움직여야 하는지 이해되지 않는다. 선생님은 긴 설명 대신 한마디를 건넨다. "그냥 그렇게 하는 거예요." 답답했다. 이유를 알아야 움직일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다도는 이해보다 먼저 .. 2026. 7. 2.
금강경(능정업장분) "헛되이 보낸 세월이 없었느니라." 「능정업장분」을 읽으며 가장 먼저 마음에 들어온 것은 "업장이 소멸된다"는 말이 아니었다. 오히려 부처님께서 하신 이 말씀이 오래 남았다. "연등부처님을 만나기 전에도 수없이 많은 부처님을 만나 공양하고 섬겼으며 헛되이 보낸 세월이 없었느니라."이 문장을 읽으며 생각했다. '정말 깨닫기 전의 세월까지도 헛되지 않았다는 말일까?' 수행자는 늘 앞으로 나아가려 한다.더 배우고, 더 수행하고, 더 공덕 쌓고, 더 좋은 사람이 되려고 애쓴다. 마치 다람쥐가 쳇바퀴를 돌 듯이 말이다. 그런데 스님께서 말씀하셨다. "다람쥐 쳇바퀴 그만 돌고 한번 내려놔 봐. 안 지쳐?" 순간 멈칫했다. 최고를 거머쥐려면 더 으쌰으쌰 해야 하는 것 아닌가? 더 열심히 해야 하고, 더 정진해야 하고.. 2026. 6. 8.
금강경(지경공덕분)-8 "그 마음 가운데 세존이 계시다" 지경공덕분에서 부처님은 아침에도, 낮에도, 저녁에도 갠지스강의 모래알 수만큼 자신의 몸을 바쳐 보시하고, 그것을 헤아릴 수 없는 세월 동안 반복하는 공덕을 말씀하신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경을 믿고 거스르지 않는 공덕이 그보다 크며, 하물며 이 경을 받아 지니고 읽고 외우며 다른 사람을 위해 그 뜻을 전하는 공덕은 더 말할 필요조차 없다고 말씀하신다. 처음에는 이것이 공덕의 크기를 비교하는 말씀처럼 들린다. 하지만 지경공덕분은 공덕의 양을 비교하는데 있지 않았다.스님께서 말씀 하시길 "공식 자체가 다르다"라고 하셨다. 몸을 바쳐 보시하는 일은 아무리 크고 많아도 인연 따라 생겨나고 사라지는 복덕의 영역이다. 그러나 경을 받아 지니고 그 뜻을 깨달아 실천하는 것은 여래의 .. 2026. 6. 4.
소란한 비밀 강은지 작가의 「소란한 비밀」을 읽었다.처음에는 제목이 조금 낯설었다. 비밀은 조용히 숨겨두는 것인데, '소란하다'는 말과 함께 있으니 어딘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책을 읽으며 생각이 바뀌었다. 비밀은 숨겨져 있을 뿐, 그 비밀을 품고 있는 사람의 마음은 결코 조용하지 않을 수 있다. 그리고 남의 비밀을 알게 된 사람의 마음 역시 마찬가지. "비밀은 숨겨진 사실이 아니라, 마음속에서 계속 소란을 일으키는 감정일지도 모른다." '말해야 할까. 모른 척해야 할까. 왜 그런 선택을 했을까. 나라면 어땠을까.' 비밀 하나가 사람의 마음속에 들어오는 순간, 마음은 소란해진다. 속 아이들도 그랬다. 하나는 동생의 탄생 앞에서 흔들렸고, 다온은 언니의 아픔을 품고 있었고, 아율은 새엄마를 받아들여야 .. 2026. 6. 2.
인연 안효림 그림책 《인연》을 읽고,,, 안효림 작가의 그림책 《인연》은 책을 펼치기 전부터 시선을 붙든다. 표지의 '인연'이라는 글씨는 마치 연줄처럼 보이고, 뒤표지의 연 모양 바코드는 작가의 재치가 느껴진다. 이야기가 시작되기 전부터 이미 '연'과 '인연'을 연결해 놓은 셈이다. 무엇보다 내 눈을 사로잡은 것은 뒷면지에 적힌 글귀였다. 부딪히고, 멀어지고, 버티고,끊어내느라 지친 우리.우리는 쉼없이 파란 하늘로 달려갑니다. 고개가 끄덕여졌다.'파란 하늘'이라는 말은 시원하고 경쾌한 느낌인데, 이상하게도 그 문장에는 애잔함이 묻어 있었다. 아마 그것은 읽는 내 마음이 비친 것이었을지도 모른다. 연을 날리는 한 사람이 등장한다. 바람이 불면 손을 놓고, 연은 하늘로 올라간다. 연이간다. 각자의 속도로. 연들은.. 2026. 5. 31.
"천국보다 성스러운_김보영" 을 읽고 "사람은 백 년을 살면서도, 백 년 전 풍습을 지키는데 평생을 쓴다.변하지 못하고, 자라지 못한 채, 그것을 당연한 질서라 믿으며 늙어간다." _천국보다 성스러운 중 「천국보다 성스러운」을 읽으며 가장 오래 남은 것은 미래 사회도, sf설정도 아니었다. 오십 세에 은퇴해 하루 세끼 쌀밥과 된장찌개면 충분하다 말하는 아버지와, 그 밥을 하는 딸 영희였다.집에서는 밥을 하지 않으면 무가치하고, 사회에서는 그 밥을 하기에 무가치한 존재.그 모순이 너무 익숙해서 오히려 슬펐다. 소설 속 신은 남성을 만들고 우월을 부여한다. 처음엔 작은 차이였을지 모른다. 하지만 인간은 차이를 우월로 만들고, 우월을 증명으로 만들며, 증명을 권력으로 바꾸고, 권력은 배제와 혐오를 낳는다. 그리고 그것을 질서라 부른다.'인간은 왜.. 2026. 5. 31.